해지는 나라(Abendland)의 세 지식인에게
파피아 (Hans-Jürgen Papier) 씨,
프라델 (Virginie Pradel) 씨,
소르망 (Guy Sorman) 씨,
안녕하세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Covid-19)이 지구적 대유행을 하고 있는 지금 부디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3월과 4월에 세 분께서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코로나 19 방역 조치에 대해 한 분은 `정신병자적 파시스트 보건 국가가 탄생했다’고 했고, 다른 한 분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감시가 심하고 처음부터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가 존재한 적이 없는 나라였다’고 했고 또 한 분은 `방역은 잘했으나 한국은 매우 감시가 심한 나라며 한국인은 유교적 전통으로부터 명령에 잘 따르고 지식인과 전문가를 신뢰하며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한다’고 부연 설명까지 했다는 것을 한국 언론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그렇게 비판하고 있을 때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독일의 유력 일간지와 주간지 그리고 방송 매체들은 한국의 방역 조치를 매우 성공적인 세계가 본받아야 할 방역 모델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실에 대한 평가가 당신들과는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한국 불교계의 큰스님 한 분의 말씀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씀을 당신들은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신념에 관한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지를 못 합니다.
그들에게 그 산은 그냥 그 산이 아니라 늑대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그 산으로 보이고, 그 물은 그냥 그 물이 아니라 동네 친구들과 물장구치며 놀던 시원한 그 물로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들은 한국의 방역 조치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방역 조치와 연관하여 당신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신념을 통해 어떤 환상을 지어내고 그 환상을 향해 비난을 쏟아낸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감염병 방역을 위해 만든 법에 따라 감염자 추적과 격리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 앱도 깨어있는 시민과 시민 단체 그리고 언론이 정부가 그 앱을 통해 얻은 개인 정보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항상 감시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난했던 당신들의 신념 속의 그런 현실은 결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당신들이 상상하고 있는 권력이 시민을 감시하는 사회가 아니고, 권력이 깨어있는 시민과 시민 단체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심하게 감시받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3 년 전 한국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촛불 혁명’으로 과거의 권위주의 국가로 회귀하는 듯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한국에서 이 같은 시민혁명의 역사는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린 고등학교 학생이 피 흘리며 부패한 반민주적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학생혁명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후 권력 공백 속에서 나폴레옹이 등장하듯 한국에서도 학생혁명 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독재정권이 탄생합니다. 수많은 대학생들의 희생과 시민들의 참여로 27년 간의 군부 독재와 군부의 정치 개입을 1987년 종식시킵니다. 이처럼 한국은 시민들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워 온 긴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관해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서구인들은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을 걸핏하면 유교 문화라는 공식에 대입해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행태는 한국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아니면 동양에 대한 오만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유교사상은 겨우 5 백년을 이어오다가 대한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쇠퇴합니다. 반면에 불교사상은 2 천년 그리고 풍류 즉 선(仙)사상은 5 천년을 이어오기 때문에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유. 불. 선(儒. 佛. 仙) 3대 사상이 하나로 어우러져(intergrated)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인간과 지구 위의 모든 만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에서 나왔고, 그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근본은 사람의 마음이며, 밝게 깨어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우주와 만물이 하나가 된다는 가르침은 5 천년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불교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자아’를 깨달으면 우주와 모든 만물이 `나’로부터 시작되며 `나’는 `무한한 능력’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절대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가르침이 2 천년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교는 인간 행동에 관한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기 때문에 비록 왕의 명령이라도 그 명령이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에 어긋나면 신하들은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결국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나’와 `우리’라는 집단은 `하나’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서구인의 분석적 사고로 판단하면 `나’보다 `우리’라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나’와 `우리’라는 집단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한국과는 달리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해지는 나라(Abendland)’의 당신들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 `절대 진리’와 `절대적 존재’를 믿기 때문에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와 `인권’은 그 `절대 진리’와 `절대적 존재’에 복종함으로써 비로소 누리는 노예의 `자유’이고 노예의 `인권’입니다.
문제는 이런 노예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이교도나 타국인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고 모욕해도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고 그들의 주인 즉, 자신들이 창조한 `절대 진리’며 `절대적 존재’에게 책임이 있는데 기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의식 구조입니다.
하지만 `절대 진리’가 `나’의 안에 있고 `절대적 존재’가 `나’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때의 `자유’와 `인권’은 `나’의 주인이며 절대자며 창조자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누리는 `자유’이며 `인권’인 것입니다.
노예의 신념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주인이 만들어 준 기준과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살지만, 주인의 신념을 가진 사람은 기준을 만드는 창조자로 살게 됩니다.
`과학적 환원주의’를 그 바탕에 두고 있는 서구의 근대 문명이 비록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바는 있지만 역시 과거의 경험과 그에 따른 매뉴얼을 가지고 있어야 다음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데, 이번 코로나 19 사태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서구 사회가 잘 대응하질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과거의 경험과 매뉴얼에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서구와는 달리 시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봉쇄 조치도 없이 정부의 모든 방역 활동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민주적 방법으로 방역 조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공감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까지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방역 체계는 새로운 세계적 방역 모델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19의 지구적 확산 사태와 그 이후를 당신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지식인들과 다양한 분야의 세계적 석학들은 다시는 코로나 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즉 새로운 세계 질서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결국 19세기에 시작한 서구의 폭력적(식민 지배)이고, 파괴적(환경 파괴)인 `근대 문명’은 이번 코로나 19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폭풍은 지나가고 인류는 살아남겠지만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 것이다.”
당신들은 이제 스스로가 과거에 만들어 놓은 절대 진리, 절대 가치에 매달려 그 기준에 맞는지 틀렸는지를 따지고 있기보다는 당신들 스스로와 당신들의 가족과 이웃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떤 조치가 더 유용한 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될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 부디 건강하시기를 기원하며
乙人 올림